조언과 생각집/조각글

오랫동안 좋아해온 글

TLdkt 2022. 8. 8.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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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뿐인 이단 우산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펴지는 우산이었지만 버튼도 듣지 않았고 수동으로 펴지지도 않았다. 비는 굵은 방울로 떨어져내렸다. 이런 날씨에 우산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않은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골목 끝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우산을 살 만한 돈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보더니 손을 흔들며 괜히 웃었다. 나는 고장난 우산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뛰어갔다. 울음을 겨우겨우 참으면서,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우산을 건넸다.

“우산이, 우산이 펴지질 않잖아. 저번만 해도 잘 됐는데, 꼭 필요하면 이래.”

 

/

쇼코의 미소, 최은영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

흰, 한강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인내를 가져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마치 잠겨 있는 방이나 아주 낯선 언어로 쓰인 책들처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것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당신은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당신을 충고하거나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말입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령하는 그 근거를 탐구하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중략) 깊은 밤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답을 찾아 당신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심각한 질문을 강력하고 단순하게 '나는 써야만 한다'는 말로 응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을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당신의 삶은 아주 하찮고 무심한 순간까지도 이 충동의 표시와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에 다가가십시오. 그러고는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마치 최초의 인간처럼 말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일상이 주는 모티프를 찾음으로써 당신을 구원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소망을, 지나가는 생각과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묘사하십시오. 그 모든 것들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요하고 겸손한 정직성을 가지고 묘사하십시오. 그리고 표현을 위해 당신 주변 사물들, 당신이 지닌 꿈의 형상들과 추억의 대상들을 사용하십시오.

창조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가 연결되어 있는 자연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암흑과 어둠에 대해 확연한 앎을 가지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잠을 푹 자고 나면 모든 것이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나요
그게 바로 어둠의 힘입니다


눈을 감고 눈자위를 꾹 눌러봐요 빙글빙글 우주의 별들이 떠다니는 걸 보세요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별의 운행입니다


몸과 마음이 모퉁이를 세게 돌다 부딪쳐 머리가 깨어지는 사고가 난 자리를 잘 살펴보세요
오늘도 포근하고 단정한 잠자리와 슬픔이 소량 필요합니다
/
송과선, 잠 , 조용미

 

 


 끄자니 덥고, 켜자니 애매한 악취로 신경을 긁는 에어컨을 보며 생각했다. 요즘의 일상과 닮아 있다고. 분명 속에 곰팡이가 피었을 것을 알지만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아 미지근한 무기력으로 지나치는 일, 불안의 더께를 똑똑히 인식하면서도 날개 한 번 닦을 새도 없이 팽팽 돌아가는 일. 오랜만의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외기 물줄기를 따라 어느새 이끼가 자라 있었다.

  주간회고를 적지 않은 게 굉장히 오래된 것 같다. 한 글자 적기에도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몇 주를 보냈던 걸까? J와 단둘이 몇 시간을 기대앉아 책을 읽으며 문득 알게 됐다. 정말 필요했던 것은 고요하게 나누는 사랑, 거칠게 땀흘리는 일, 나를 기록하는 시간뿐이었음을. 마음이 복잡하다는 핑계로 내가 나에게 귀기울이지 않은 대가는 텅 빈 초조함이었다.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문장을 다시 곱씹으며 안정감을 찾으면서도, 6년이라는 시간이 성큼 흐른 뒤에도 같은 문장에 감명을 받는 스스로가 변함없다고 해야 할지, 여전히 아이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3년쯤 된 것 같다. 시작과 포기라는 개념조차 없이, 거창한 마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글밥을 쌓아왔다.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비해 풀어낼 수 있는 표현이 부족한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최소한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막막함이 들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볍게, 간단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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